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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축제

제목: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그게 바로 정이다
 

1949년, 대만과 중국은 대시대의 무대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군대를 위주로 대량의 외성(外省)인들이 각 종 배를 타고 대만으로 건너왔으며, 각 다른 시점, 지역, 시간에 대만 본도와 금문(金門), 마조(馬祖), 펑후(澎湖) 등 외섬에 이동했습니다. 
 
단, 원래는 임시로 대만에 머물기로 했지만, 이 곳에서 60년이나 세월을 보내며, 이 또한 외성(外省)인 군대를 포함한, 주민들, 그리고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장계석 총통이 이끌어 온 국민정부는 군대와 군인 자족들을 대만 북쪽에서 남쪽까지 각 지역으로 나누면서 각 지방에서 마을이 생기고 그후는 줸촌(眷村)이라고 불러왔습니다. 
 
당시, 민난(閩南) 사람과 하카(haka) 사람의 마을은 서로 다른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추레한 대나무 울타리로 군인촌을 상징으로 격리했습니다. 특히 1947년 228 사건후에, 대만 사회에는 은은히 불안한 분위기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핑동현의 각 지역에도 많은 군인촌이 있었으며, 대부분 핑동시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배낭여객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은 칭다우로(青島路) 지역이 바로 당시 손리런(孫立人)장군 군대가 주둔했던 곳입니다. 비 주류 부대 또는 뒤 늦게 대만에 온 소형 군부대들은 멀리까지 리강향(里港鄉), 헝춘진(恆春鎮), 가오수향(高樹鄉) 지역에 거주 했으며, 일부 외성(外省)인들이 하카인 지역에 옮긴 곳은 대부분 차우저우(潮州) 지역이었습니다.  
 
리강향(里港鄉)의 딩웬(定遠), 신궈(信國) 마을은, 티엔미엔(緬)에서 철수한 국군으로 구성된 마을입니다. 핑동시의 자유신촌, 차우저우진(潮州鎮)의 펑웨이(風尾) 마을,  가오수향(高樹鄉)의 후판(虎磐) 마을은 따천다우(大陳島)와 이쟝산(一江山)의 주민으로 구성된 군인촌이며, 따천(大陳) 사람들이 핑동현에서 구성된 마을은 약 20개였습니다.
 
대체로 말하면, 핑동의 군인촌은 대부분 공군 마을입니다. 예를 들면, 핑동시의 쾅셰(礦協)신촌, 총더(崇德)신촌, 따펑(大鵬)신촌, 차우저우진(潮州鎮)의 차우저우신촌, 동강진의 공화신촌등이, 다 공군 군인 마을이며, 총 25개 곳이 있으며, 육군은 3개로 많지 않습니다.(주1)  
 
핑동현으로 이민한 외성(外省) 사람의 인구 통계는, 1990년전에 신분증에 외성(外省)인이라고 표기되어 있었으나, 1991년후에 이러한 종족 차별의 표기가 취소되고, 출생지로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외성인구 통계는 1990년까지만 파악되고 있습니다.  
 
1949년에 핑동현으로 이동한 외성(外省) 사람은 약 3만명이고, 남성이 비교적 많았고, 1970년에는 10만명 가까이로 가장 많았습니다. 그후 2세대의 직장과 혼인관계로 군인촌을 떠나, 핑동현의 중국 외성(外省)인 인구가 빠르게 줄어졌습니다.(주2)  
 
그당시, 군인촌의 외성(外省) 사람의 생활 조건은 비슷했으며, 공군, 해군의 연봉이 비교적 조금 높았고, 육군체계는 비교적 어려웠으며, 대부분 자신의 중국 북방식 면 음식 솜씨로 면 가게를 차려 생활에 보탰으며, 특히 군인촌의 미식 소고기면은 점점 현지인의 일상생활 미식 메뉴로 유명해 졌습니다.
 
주1: 핑동현지(縣志) 참고, 2014년판
 
주2: 핑동현지(縣志) 참고, 2014년판